여행/Camino de santiago

#4 힘들었던 둘째 날. 수비리까지(Roncesvalles-Zubiri)

beercat 2013. 2. 1. 17:43

-4.27(2) Roncesvalles -> Zubiri(22km)

07:20 ~ 16:00

 

 

 

 

오늘도 새벽 4시쯤 깼다. 뜬 눈으로 한 시간 넘게 지새다 살짝 잠들었는데 웅성거리는 리에 일어나보니 벌써 6:20분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짐을 챙기는데 옆의 독일부녀는 추운지 비치타올을 휘감고 웅크리고 잔다. 그리고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정신없이 정리하고 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A누나는 이미 아침을 먹고 내 것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 스프를 끓여줬다. 여기에 1유로짜리 빵과 함께 먹었다. 다행히 신발은 90% 정도 마른 것 같다. 어제의 충격에 상 하의 전부 우의로 챙겨 입었는데 제길, 비가 안 온다(하루종일 맑았다).

 

 

 

오늘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무릎이 너무 심하게 아팠다. 가다쉬다 반복해 민폐인 거 같아 A누나를 먼저 보냈는데 오늘 하루종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오늘 목적지인 수비리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쉬고 있을 때 어제 저녁을 같이 먹은 Rob을 만났는데 걱정을 많이 했다. 사실 무릎뿐만이 아니라 허리, 발목, 어깨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걸으며 곰곰히 생각을 했다. 

 

 

'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부터 5Km 정도씩만 걷다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전 지점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나'

'카미노는 포기하고 스페인 관광이나 할까?'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 됐든 오늘은 어떻게든 목적지인 수비리까지 가야 한다.

 

 

 

아침 안개가 심했는데 차차 개더니 좋은 날씨가 되었다. 더워서 우의를 벗고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런데 어랏? 선글래스가 너무 잘 보이는 것이다. 내가 쓰는 선글래스는 안경위에 끼우는 방식인데 이게 색이 너무 진해서 한국에서 쓸때는 날씨가 좋은 날이라도 우중충하게 보였다. 그런데 여기, 스페인에서는 너무나 잘 보였다. 그만큼 햇살이 따갑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이태리제라 같은 유럽의 햇살에 적당하게 만들어진 건가:)

 

 

 

 

중간에 카페가 있었는데 순례자들이 점심을 먹고 있으니 고양이들이 갖은 애교를 부리며 음식을 나눠 달라고 하는 제스춰를 취했다. 고양이랑 잠시 놀고 있으니 아까 길에서 인사한 Ryo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Ryo는 일본인이었는데 어머니가 한국사람이고 미국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가 더 편해 보였다. 초리소 보카디요를 먹었는데 한국에서 먹는 보통의 샌드위치랑은 달랐다. 초리소 보카디요를 시키면 바게트에 초리소만 달랑 끼워주고, 계란 보카디요를 시키면 계란만 달랑 끼워준다. 처음엔 당황했는데 나중엔 그러려니 하고 먹게 된다. 한국의 채소도 들어있는 샌드위치가 그리웠다.

 

 

 

 

 

 

 

점심을 먹고 다시 걸었는데 여전히 무릎이 아프다. 쩔뚝쩔뚝 걷고 있으니 옆에서 같이 걷던 이태리 할머니가 무릎 아프냐고 하더니 나보고 손짓을 하며 잠깐만 기다려 보려고 한다. 힙쌕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게 준다. 뭔가 싶었는데 글루코사민이었다. 속으로 너무 웃겨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할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약국 가면 파니까 이거 사서 오래 먹어야 한다는 얘기도 잊지 않으셨다. 건강식품 좋아하는 건 한국이나 유럽이나 같나 보다.

 

 

<카미노를 걷다 돌아가신 어느 일본인의 추모비>

 

 

<날씨가 좋을때 이렇게라도 빨래를 말려야 한다>

 

아프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리가 안 아프다면 카미노 끝날 때까지 술을 입에도 안 대겠다던가 하는 그런 맹세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정말 이 말을 내뱉은 지 얼마 안 돼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거짓말처럼 무릎이 아프지 않은 것이다. 오! 정말 내가 이 맹세는 지킨다! 하고 열심히 걸었다. 하지만 이내 무릎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술 먹어야겠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오니 자그마한 동네가 보인다. 전부 같은 흰색 벽에 주황색 지붕(기와)이 통일감 있었다. 수비리에 도착한 것이다.

 

 

 

 

마을 입구에 알베르게가 2곳, 좀 더 들어가면 공립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나는 그냥 잘디코라는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아침 포함해서 15유로. 그리고 저녁은 12유로. 비쌌다. 하지만 건물이 깨끗하고 넓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여기가 공립 알베르게>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있는데 3,4살 밖에 안된듯한 여자애가 과자를 사와서는 카우보이 모자 쓴 아저씨와 나처럼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는게 너무 귀엽다>

 

빨래도 하고 신발도 말리고 대충 정리를 하고 나서 동네 마실을 나섰다. 햇빛이 강렬한 게 역시 서유럽이다. 바르(Bar)가 보여 맥주 한잔을 하고 돌아와 여유롭게 테이블에 앉아서(얼마만의 테이블인가) 일기를 쓰는데 어제 옆 침대에서 만난 독일 부녀를 또 만났다. 일기를 다 쓰고는 맨소래담로션으로 무릎의 아픈 부분을 열심히 맛사지 했다. 아픈 부위는 열심히 만져주고 관심을 가져줘야 낫는다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저녁 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샐러드, 스프, 오믈렛 비슷한 것, 돼지 갈비, 와인까지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여기서 동양인은 나 혼자라 사실 좀 뻘쭘했는데 내 옆에 앉은 Piet란 할아버지가 말을 계속 걸어줘서 심심하진 않았다. 장난이 심해 배부른데도 계속 내게 음식을 주었다. 그 뒤로 옆의 아주머니 무리랑도 계속 말을 주고받는데 역시나 영어가 딸린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와인에 취해 침낭에 쏙 들어가 누워 있으면 정말 뿌듯하다. 카미노는 생각의 길이라는데 내 머릿속에는 

온통 무릎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일단 몸이 정상이 되어야 이 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사용경비

빵 1

초리소 보카디요 3.5

콜라 2.5

알베르게 15

저녁 12

맥주 3.4

음식 5.2총 42.6 / 103.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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