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들기 전에는 그렇게 더워서 침낭을 걷어차고 잤는데 아침엔 역시나 쌀쌀했다. 새벽에 일찍 깨버렸는데 갑갑해서 더는 누워있을 수 없었다. 이른 새벽이었는데도 아직 여름이라 그런지 날은 밝았다. 협재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고는 씻고 라면을 끓였다.
이 버너로 말 할 것 같으면 나랑 나이가 비슷한 녀석으로 아버지께서 매우 애지중지하시던 물건이었다. 덕분에 내 어릴 적 캠핑갔을 때 사진을 보면 이 녀석이 항상 등장했다. 서울에서 녹을 제대로 벗겨오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불붙는 거 확인하고 가스 안 새는 것만 확인하고 가져왔다. 구입한지 약 35년, 안 쓴지 15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무리 없이 작동되는 걸 보면 신기하다.
<이 코펠도 30년은 된 물건. 라면 하나가 딱 들어간다>
화력이 달라서 그런지, 냄비가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라면 맛이 다르다. 끓는 물에 라면 넣고 항상 하던 식으로 라면을 끓였는데도 말이다.
라면을 먹고는 가져온 스타벅스 비아로 커피를 마셨다. 인스턴트 원두 중에서는 제일 진하고 맛있다. 그런데 스테인레스 컵에서 쇠 냄새가 많이 난다. 티타늄 컵을 쓰면 괜찮을까?
커피를 마시며 어제 급하게 세운 텐트를 보니 하룻밤 자기에는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처럼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만.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옆 텐트에서 사람이 나와서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이분은 국토종주를 마친 후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오셨다고 한다. 잠깐 얘기를 나누다 그분은 이제 출발해야겠다며 텐트를 정리하셨고 난 오늘 목표가 표선해수욕장이었고 시간이 넉넉했기에 좀 더 있다가 가...려고 했지만 여기서 뭐 도저히 할 게 없어서 나도 텐트를 걷고 준비를 해서 출발을 했다.
<이 여행에서 아이폰이 큰 역할을 했다>
<여탕>
지나가던 길에있던 게스트하우스인데 좀 유치하다...
<이국적인 모양의 교회>
출발하고 많이 지나지 않아 아까 협재 캠핑장에서 같이 잤던(?) 그분을 만났다. 서로 혼자 여행하기에 서로 사진을 한번씩 찍어주고는 다시 갈 길을 갔다.
그분이랑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유 있게 라이딩을 하다 그분은 내 시야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몇 시간쯤 탔다 싶었는데 모슬포항이 나왔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모슬포를 지나면 밥 먹기가 조금 애매할 것 같아서 전에도 갔던 적이 있던 산방식당을 갔다. 그런데 작년에 왔을 때도 쉬는 날이었는데 하필이면 오늘도 쉬는 날이었다. 나는 이 식당이랑 뭐가 안 맞나 보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짬뽕이 맛있다는 홍성방을 갔더니 여기도 문을 닫았다. 이날 식당운은 너무나 없었다. 건물이 공사중이네.
그런데 점심을 먹으려고 모슬포에서 돌아다니다 그분을 다시 만났다. 인연이 있는 듯^^ 마침 산방식당을 가려고 한다기에 문 닫았다고 얘기해주고 같이 식당을 찾다가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는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다시 또 만나자며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헤어졌다.
<저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송악산에서 시원하게 다운힐>
이날의 복병은 더위였다. 너무너무 덥고 뜨거운 햇볕에 살이 다 익는 느낌이었고 제주도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계속되는 업힐과 다운힐의 연속으로 너무 지쳐버렸다. 너무 뜨거워 어느 가게 차양 아래서 잠시 쉬다가 생각해보니 표선까지 가는 건 도무지 무리였다. 이렇게 오르막 내리막이 많을 줄 알았다면 표선까지 목적지로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텐트 칠 곳을 검색해보니 서귀포 자연휴양림이 자전거로 1~2시간 거리에 있기에 야영할 수 있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오늘 비 예보가 있어 낙뢰 위험 때문에 안 받아준다고 한다. 해가 쨍쨍하고 일기예보에 내일 비 올 확률 0% 가까운 상태라 너무나 황당했지만, 항의 한다고해서 될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쉬다 다시 출발했는데 동네 처자로 보이는 젊은 분이 그늘에서 커피를 팔고 있는데 쉬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이런 젠장 여기 이렇게 커피를 파는 줄 알았으면 여기서 쉬는건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아쉽지만 사양하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계속되는 오르락 내리막을 달려 한참을 왔더니 제주 컨벤션센터까지 왔다. 그런데 뭔가 행사를 하는지 경찰 깔린 게 장난이 아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가카께서 다녀가셨다고 한다.
<정말 예뻤던 아프리카 박물관. 다음에 자전거 없이 오게되면 들러보리라>
<태풍때문에 이렇게 신호등이 돌아가버린 곳이 많았다. 자연은 무섭다>
가다 보니 정말 표선까지 가서 텐트 치는 건 무리라는 판단. 그래서 올 4월에 묵은 적이 있는 두나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자리 없으면 앞마당 잔디밭에라도 텐트를 치려고 했었는데 다행이었다. 게스트하우스까지 천천히 가도 두 시간. 이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내 몸에는 여유가 없었다.
앞에 저런 오르막이 있어서 가게를 하이랜드라 지었는지... (막상 가까이 가보니 오르막은 그리 높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오르막 내리막에 지쳐서 몇 번이나 쉬게 되었고 쉬다가 협재해수욕장 야영장에서 내 텐트 옆에 텐트치고 잔 브롬톤 커플도 다시 만났다.
오르막을 계속 올랐더니 이르게 먹었던 연료가 바닥이 났다. 배에서 꼬르륵할 정도로 배가 고파 쉴 때마다 당이 떨어지지 않게 초코바를 까먹으며 서귀포 시내로 들어왔다. 점심때 먹지 못한 밀면이 계속 생각이 나서 전에 간 적이 있는 '관촌'에서 밀면을 시켰다. 시원한 밀면은 정말 천국이었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보목포구까지 가는 길은 지옥 길이었다. 배가 부르니 몸이 처져서 자전거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겨우겨우 도착한 두나게스트하우스는 변함없었다. 실내에서는 스쿠버 자격증 따려는 사람 교육중이었고 난 침대를 배정받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샤워하고 나오니 다른 여행자와 마주쳐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이 분도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마침 침대도 바로 옆자리다. 씻고, 빨래하고 잠시 쉬다 그 형님과 저녁에 밖에 나가서 소주 한잔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땅히 먹을 데가 없었다(그걸 감안하고 나는 미리 밀면 먹고 온거지만). 그래서 슈퍼에서 맥주를 사 와서 같이 마시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회사랑 같은 곳을 다니셨다. 지역은 다르지만. 그래서 급속도로 친해져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스킨스쿠버랑 게스트하우스에 관심이 많이 일부러 여기 두나에 오신 거였다. 내일은 레프트핸더라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신다고 한다. 레프트핸더 게스트하우스는 독특하게 주택을 매입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전 과정을 블로그에 공개를 해놔서 주인을 만나고 싶어 간다고 하는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자전거 여행객 한분이 더 오셨고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 12시가 다 되어 모두들 침대로 돌아갔다.
사용경비
점심 10,000
저녁 8,000
게스트하우스 20,000
맥주 11,400
= 50,000
http://www.endomondo.com/workouts/89200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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